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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각 프로야구 팀별 코치진 - 한화

sk의 독주가 계속 되는 가운데 대항마로 떠오르는 팀이 있습니다. 한화 이글스.
화끈한 타선으로 홈런 공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타격이 좋은 팀이죠.
그동안 단점으로 여겨지던 느린 발도 클락, 추승우 등 발빠른 타자들이 가세하면서
많이 커버되고 있네요.

지난주 sk와의 3연전은 정말 재미나게 하더군요. 어제 경기는 무려 15회까지 가는 접전끝에
아쉽게 캐넌 김재현 선수에게 끝내기를 맞고 말았지만....
투아웃에서도 큰 거 한방을 언제든 터뜨릴 수 있는 타선이라 그런지 sk 투수들 조마조마 했을 겁니다.
김성근 감독도 라이벌이 될 거라며 긴장감을 내비치더군여.


수석코치 : 유지훤 (55년생)

1982 - 1988  OB베어스 선수
1989 - 1989  OB베어스 코치
1990 - 1991  쌍방울레이더스 코치
1992 - 1997  OB베어스 코치
1999 - 2004  두산베어스 수석코치
2005            한화이글스 1군수석코치

OB베어스 원년 멤버로 원년 우승 당시 박철순 선수가 던진 마지막 타구를 처리했던 유격수 출신
유지훤 코치.
87년 플레이오프 당시 해태에게 뼈아픈 실책하나로 결승전 티켓을 넘겨주게 되는데요.
이 실책이 유지훤 선수 였습니다. 평범한 김성한 선수의 땅볼을 머믓거리며 처리하는 바람에
3루주자가 홈으로 들어오고, 결국 연장전에서 OB는 패하고 말죠.
1983. 7.12 - 8.6  47연타석 무안타를 기록하여 역대 최다 기록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타순은 8번 아니면 9번 등 매번 하위타순에 배정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실한 자세와 안정된 수비(뛰어나지는 않다)를 바탕으로 OB유격수 계보의 시금석이 된
유지휜 코치. (실제 두산의 유격수는 공격보다는 수비가 더 강점이었다.)
선수 생활을 마치고 당시 새로이 창단되던 쌍방울 초기 코치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이때 감독이 김인식 한화 감독이었죠.
그러다, 다시 친정팀 코치로 돌아가고, 95년부터 김인식 감독과 또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됩니다.
2005년 한화에 온것도 덕장으로 알려진 김감독의 情과 신망으로 이루어졌겠죠.

화려한 선수 생활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실책도 많이 해보고, 워스트 기록까지 보유하고 있는
터라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줄거라 생각되네요.


타격코치 : 장종훈 (68년생)

1987 - 1992  빙그레 이글스 선수
1993 - 2005  한화 이글스 선수
2006 - 2008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08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1988년  일간스포츠 KBS 월간 MVP
1988년  제1회 미스터 빙그레
1988년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1990년  KBO 타점 1위, 장타율 1위, 홈런 1위
1990년  일간스포츠 올해의 최우수타자상
1990년  스포츠서울 올해의 선수상
1990년  골든글러브 유격수부문
1991년  프로야구 정규리그 MVP
1991년  체육기자연맹 선정 MVP
1991년  골든글러브 지명타자부문
1991년  한일슈퍼게임 5차전 MVP
1991년  타격부문 4관왕, 최다홈런, 최고장타율, 최다안타, 최다득점
1992년  골든글러브 1루수부문
1992년  프로야구 정규리그 MVP
1992년  시즌 타격부문 3관왕, 최다홈런상, 최다타점상, 최고장타율상
1995년  골든글러브 1루수부문
2005년  일구회 특별공로상 

출전 1950경기, 타점 1145, 득점 1043, 안타 1771, 홈런 340, 타율 0.281

연습생 신화의 시초가 된 장종훈 코치.
위에 열거된 각종 상과 통산 기록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타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한화는 송진우 선수를 비롯해 정민철, 구대성 등 프렌차이즈 스타가 굉장히 많군요.)
87년 연습생으로 입단해 바로 주전 유격수 자리를 꽤차고, 90년 91년 92년 최전성기를
보내게 됩니다.
이 당시 그의 기록은 타율-홈럼-타점순으로

90년 0.290-28-91 / 91년 0.345-35-114 / 92년 0.299-41-119

놀라운건 홈런갯수였습니다. 30개도 모잘라 누구도 달성 못하리라 생각되었던 40개의 홈런을
쳤었던 그에게 홈런타자라는 칭호는 당연한 거였죠. 여기에 시즌 MVP를 비롯해 타격상이란 상은
죄다 휩쓰는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홈런타자와는 거리가 먼 체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많은 혼럼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한 배팅
포인트와 힘을 한번에 실어 날리는 순발력이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김재현 선수를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래서, 그가 친 홈런은 대부분 라인드라이보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죠.

92년 이후 고질적인 무릅부상으로 페이스를 급격히 잃게되면서 2시즌을 침체속에 보내게 됩니다.
이후 부활하지만, 널뛰기 성적을 보이며 예전만큼 폭팔적인 성적은 못 올리게 되죠.

여기에 부상으로 주춤한 사이 이종범, 양준혁 등 젊은 스타 선수들이 떠오르면서 팬들의
관심 또한 예전같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팀에서 갖는 비중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요.
정신적인 지주로 연습생들의 신화로 팀 4번타자로 자리를 지키며, 끝내 한화를 99년 우승 시키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2000년 들어서면서 팀이 리빌딩 계획을 세우고, 결국 장종훈 선수는 은퇴를 결심하게 됩니다.
은퇴이후 한화 2군에서 유망주들을 키우다 올해부터는 1군 타격코치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지도
편달하고 있군요. 수비와 주루에 비해 타격에는 큰 기대 안했던 클락과 가능성만 있었던 추승우를
다듬어 올 시즌 스포라이트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대도 역시나 장종훈 코치는 코치라는 칭호보다는 선수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 하네요.
현역시절 지금과 같은 선수보호 시스템과 의료기술이 있었다면 트윈스의 김정민,
히어로스 김동수 선수 처럼 아직도 현역으로 뛰었을 선수였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투수코치 : 이상군 (62년생)

1983 - 1985  국가 대표 선수
1986 - 1995  한화이글스 선수
1998 - 2003  한화이글스 코치
2003            LG트윈스 1군투수코치
2007            한화 이글스 1군투수코치

1983   백호기야구대회 최우수투수상
1983   부산시장기야구대회 최우수투수상

뛰어난 제구력으로 초창기 한화 마운드를 지켰내었던 에이스 이상군 코치.
면도날 같은 제구력으로 무려 48.1이닝 동안 사사구를 내주지 않는 진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사사구 경기를 무려 7번이나 갖고 있을 정도로 제구력의 달인입니다.

하지만, 고무팔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데뷔 후 초창기 2시즌 동안 246이닝씩 소화하는 혹사를
당하며, 이 이후 150이닝 이상을 던지지 못했죠.
통산 방어율 3.30  100승 77패  30세이브의 기록에서 보듯 언제나 많은 실점을 하지 않는 안정적인
피칭을 하였습니다. 당시 장종훈, 이강돈 등 막강 타선을 보유하기도 했지만, 번번히 해태의 높은
벽에(특히 선동렬 선수) 부딧쳐야 했습니다.

못 이룰 꿈을 뒤로 하고, 혹사당한 고무팔을 부여잡으며, 96시즌을 끝으로 코치연수를 받으며
선수생활을 마감하지만, 99시즌 다시 선수로 컴백하여, 중간계투, 마무리 등 가리지 않고 출전.
끝내 선수시절 내내 이루지 못했던 우승을 차지하였고 (99년), 통산 100승도 달성(2000년)할 수
있었습니다.
 
영웅도 때를 잘 만나야 빛이 난다는 말처럼 해태라는 팀과 선동열이라 선수만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01년 시즌을 끝으로 한화와 트윈스에서 코치생활을  하다 작년 시즌부터 다시 한화 투수 코치를
맡고 있습니다. 일부 팬들은 이상군 코치가 너무 제구 위주의 피칭만을 선수들에게 강요한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제구를 위해서는 어느정도 구속저하는 피할 수 없으니깐요.
음..하지만, 코치들마다 각자 자기 스타일이 있고 장점이 있습니다.
이상군 코치가 제구를 위주로 선수들을 다듬는 다면 2군에는 최동원이라는 불세출의
강속구 투수가 있으니 어느 정도 보완이 되지 않나 싶네요.


수비코치 : 강석천 (67년생)

1989 - 2003  한화 이글스 선수
2003            한화 이글스 코치

3루수를 맡으며, 하위 타선, 주로 7번이나 9번을 맡으며 3할을 기록할 정도로 타격이
좋았던 강석천 코치.
99년 한화 우승 당시 주장을 맡으며 정신적 지주 역활을 했던 리더 였습니다.

99년 당시 타율 0.303  타점 42  득점 65  도루  24 등 하위타선에 뇌관 역활을 톡톡히 합니다.
데이비스, 장종훈, 송지만 등 강타자들이 즐비한 클린업라인을 지나고 나면 바로 강석천 선수가
있었던 거죠.

90시즌 통산 4번째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던 호타준족이었던 강코치.
데뷔 초창기 장종훈·이정훈·이강돈이라는 강타자들의 사이에 가려 그 이름조차 알리기
힘들었지만, 그 시절 주전들이 하나 둘 전성기를 보내고 져무를 무렵인 90년대 후반 그는
그동안 묵묵히 자기 할일을 했던 공로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죠.
97년 주장을 맡으며 선수 시절 처음으로 3할의 타격을(0.322) 보여주며 회춘의 기미를 보이고,
끝내 99년 영광을 손에 넣습니다.

2000년 FA로 3년간 5억원에 어찌보면 너무 수수한 가격에 소속팀과 계약을 맺은 강석천 선수
실력은 그 누구와도 견줘워도 모자람이 없고, 하위타선에 주로 배치됬지만, 때에 따라서는
톱타자도 마다하지 않았던 마당쇠 역활을 누구보다 잘 해냈지만, 네임벨류 탓인지...그 계약은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승엽, 선동열, 이만수 등의 선수들 뿐만 아니라 강석천 코치 처럼 묵묵히 자기 할일에 충실한
선수들이 있어야 팀이 꾸준한 성적을 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선수가 아닌 코치로서 자기와 같은 마당쇠 선수들을 많이 코칭해주길 바란다.


배터리코치 : 김호근 (60년생)

1983            롯데 자이언츠 선수
1984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
1986            OB 베어스 선수
1990 - 1992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
1993 - 2000  고려대학교 야구부 코치
2003 - 2004  춘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6            한화이글스 코치

고교시절 양상문 현 트윈스 투수 코치와 더불어 부산고를 최강의 팀으로 만들었던
공격형 포수 김호근 코치.

고교시절 각종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로 뽑히며 화려한 야구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고교 졸업 후 대학교때 김경문에 가려 백업포수로 머물게 됩니다. 당시 공격형보다는
수비형인 김경문 포수가 더 나은 평가를 받았었죠.

대학 졸업 후에는 고향팀인 롯데로 갔으나 역시나 백업.
그후 인천을 연고로하는 청보로 갔으나 금광옥(감사용에서 이혁재가 맡았던)이 버티고 있던지라,
역시나 백업 포수.
이듬해 85년 청보로 이름을 바꾼 삼미는 다시 OB와 트레이드를 통해 김호근을 보내게 됩니다.
당시 OB에는 김경문과 조범현이 있어죠. (김경문과는 악연인가여...-_-) 역시나 여기서도 백업.
결국 신생팀인 쌍방울로 옮기게 되고,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전으로 한 시즌을(91년)
치르게 됩니다.

11시즌을 치르면서 고작 690경기에 나섰다. 1시즌에 62경기에 나선 꼴..
재능이 많았으나, 운이 너무나도 없었던 포수였죠.
제대로 기량을 펼쳐보이기도 전에 이곳저곳을 떠다녀야 했던 김호근 코치.
프로야구와는 미련이 없었던지 93시즌을 끝으로 은퇴, 고려대, 춘천고 야구부 등 아마야구에서만
10여년을 있게 됩니다.

그러다, 2006년 쌍방울 시절 그를 주전으로 기용해주었던 김인식 감독으로 인해 다시금
코치로 프로무대로 돌아오게 되지요. 포수가 약점으로 지적되는 팀 중에 하나인 한화.
특수 포지션인 관계로 제대로 된 포수를 키울려면 족히 5년은 걸린다는데..
신경현이라는 선수 이외에 유망주만이 있는 팀에서 선수시절 못다 핀 재능을 물려줄 수 있을지
기대해 봅니다.